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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지왕 때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얽힌 애절한 사연이 있는 장사벌지지(양지버들) / 2012.02.16. 경주 문천

토함 2012. 2. 18. 22:15

 

▲ '장사 벌지지' 비의 뒤편 저 멀리 소나무 숲에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 경주 문천

 

 


 


 

▲ 신라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부인 유적비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에 얽힌 애절한 사연

 

내물왕에서 눌지왕 때에 이르는 시기의 신라는 국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고구려에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같은 영주가 나타나 국토를 넓히고 남진 정책을 강화하였는데, 신라는 이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왜국이 쉴새없이 침입을 해왔다. 하는 수 없이 신라에서는 인질을 두 나라에 보내고 국력을 키울 시간을 얻어야했다. 내물왕의 두 왕자 보해와 미해는 각각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가 왕위에 오른 지도 십 년이 되었다. 왕은 이국 땅에서 고생하는 동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날로 간절해졌다. 왕의 이 간절한 소망을 풀기 위해 나선 이가 박제상이었다.

 

그는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보해를 구출하고 다시 미해를 구출하기 위해 왜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었다. 박제상은 집에 들러지도 않고 왜국으로 향했다.

 

그의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생전에 남편을 한 번이라도 만나보기 위해 뒤쫓았으나 따라가지를 못했다. 남편이 이렇게 떠나 버리자 절망에 빠진 부인은 망덕사 문 남쪽 모래 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워 통곡했다. 그래서 그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또한 부인의 친척 두 사람이 달려와서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는데, 뻗친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벌지지(伐知旨)가 되었다. 곧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 벌지지(伐知旨)가 된 것이다.

 

지금은 벌지지를 '양지버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양다리뻗음'이 '양지뻗음'으로 또 '양지버들'로 전음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출처 :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답사여행의길잡이'>

 

 

 

 

 

 

 

'長沙 伐知旨' 비 뒤로 보이는 솔숲에는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아래 수로 둑 밑에 팔각석주(위의 사진 중간 우측부분에 조그맣게 보임)가 있다. 

 

 

 

▲ 망덕사지 당간지주

 

▲ 망덕사지 대밭 아래 논에는 보기에 좋은 팔각석주가 있다. 

 

 

 

▲ 수로가 있는 둑 아래에 있는 팔각석주는 윗부분이 둥글게 장식되어 있고, 그 뒷쪽에는 둥근 홈이 파여 있다. ▼

 


 


 

 

 

 

 

 

 

 ▲ 망덕사 중문지 밖의 계단이 있던 자리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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