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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무열왕릉과 태종무열왕릉비 / 2010.02.18. 경주 서악

토함 2010. 3. 1. 18:29

 

 

 

사적 제20호  신라무열왕릉(新羅武烈王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신라 제29대 무열왕(재위 654∼661)의 무덤으로,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있는 5기의 큰 무덤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있다.

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본명은 김춘추이다.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로,『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661년 6월에 죽어, 죽은 왕에게 태종무열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영경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으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무덤에 비해 봉분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다.

무열왕릉은 신라의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가치가 있으며, 1972∼1973년에 주변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仙挑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종렬(縱列)한 5기(基) 대형분(大形墳)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圓形)의 봉토분(封土墳)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일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護石)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전방 동북쪽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능비(陵碑)가 있는데 현재는 비신(碑身)을 잃고, 귀부(龜趺)와 이수(이首)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는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거북 모양이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寫實的)이며, 등의 전면에는 귀갑문(龜甲文)을 시문하고 그 주위엔 비운문(飛雲文)을 돌렸다. 이수(이首)는 좌우에 삼룡식 육룡(三龍式 六龍)을 표현하고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 전면(이首 前面) 중앙에는 전서(篆書)로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양각되어 있는데《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속(續)에 의하면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지었다고 한다.

이 능은 신라의 역대 왕릉 가운데 피장자(被葬者)가 명확한 유일한 능이다. 이 왕릉(王陵)의 주인공인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재위(在位) 654∼661)은 본명이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며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왕비는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서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서기 660년 6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는 무열(武烈)로, 묘호는 태종(太宗)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데 영경사 자리가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능 동쪽에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이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수(이首)의 비문(碑文)을 고려할 때 그 후방의 묘가 무열왕릉(武烈王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재 능역(陵域)에 담을 돌려 쌓고 능 주위에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1972∼1973년의 공사결과이다. <해설: 문화재청>

 

 

 

 

 

 

 

 

 

 

 

 

국보 제25호  신라태종무열왕릉비(新羅太宗武烈王陵碑)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이다.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비(碑)들은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받침돌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고, 비몸위의 머릿돌에는 이무기의 모습을 새겨져 있는데, 태종무열왕릉비는 이러한 양식이 나타난 그 최초의 예가 되고 있다.

비각안에 모셔져 있는 비는 현재 비몸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위로 머릿돌만이 얹혀져 있다.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에는 큼직한 벌집 모양의 육각형을 새긴 후,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碑座: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 주위로 연꽃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머릿돌 좌우에는 6마리의 용이 3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받들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고 새겨 놓아 비의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건립되었으며, 명필가로 유명했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글씨로 비문을 새겨 놓았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강한 인상을 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인들의 진취적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능숙하게 빚어낸 기법에서 당시 석조 조각의 발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비석(碑石)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원년(元年)(661)에 무열왕(武烈王)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지금은 비(碑)의 대석(臺石)이었던 귀부(龜跌)와 비신(碑身) 위에 얹혔던 이수(이首)만이 남아 있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신라통일(新羅統一) 초기(初期)의 씩씩한 기상을 볼 수 있어, 여의주(如意珠)를 받들어 올린 여섯 용(龍)을 새긴 이수와 더불어 동양(東洋)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는 칭찬이 높다.

그리고 이수에 새겨진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의 여덟 글자는 무열왕(武烈王)의 둘째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의 글씨라 전한다.

귀부(龜跌)의 길이 380cm, 너비 249cm, 높이 103cm, 이수 높이 106cm이다. <해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