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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계 옥고(玉沽)선생과 보백당 김계행(金係行)선생을 모신 곳, 길안 묵계서원 자료를 복원하다 / 2009.11.12.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토함 2012. 11. 17. 23:27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35-1 (길안면 국만리길 70)에 자리한 묵계서원은 옥(玉)씨와 김(金)씨가 함께 관리하는 서원이다. 이 곳은  의령 옥씨인 응계 옥고(玉沽,1382~1436)와 보백당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13)에 창건되었다.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9(1980.06.17지정)로 지정 됨.

 

 

 

 

 

 

 

 ▲ 위의 안내문을 누르면 크게 확대하여 볼 수 있습니다.

 

 

 

 

 

 

 

 

고(玉沽, 1382~1436)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대수(待叟), 호는 응계(凝溪). 증조는 전백(全伯)이고, 할아버지는 안덕(安德)이며, 아버지는 사미(斯美)이다.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원시를 거쳐 1399년(정종 1) 18세에 식년문과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뒤 성균관의 학유(學諭)·학정(學正)·박사·전적(典籍)과 안동부통판(安東府通判) 등을 거쳐 1408년 (태종 8)경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로 파견되었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의 설치와 함께 재행이 있다 하여 교리(校理)에 선보(選補 : 선발되어 제수됨)되었으며, 정언(正言)·예조정랑, 황해도문민질고사(黃海道問民疾苦使), 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성품이 청렴결백할 뿐만 아니라, 총명한 자질로 학문에 힘써 명망이 높았다.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안동의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빛이 부족한 곳에서 찍은 사진은 다시 보완해야 됨.

 

 

 

 

 

 

 

 

 

 

 

 

 

 

 

 

김계행(金係行, 1431~1517)

 

김계행(金係行, 1431-1517)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취사(取斯), 號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이며 본관은 (신)안동이다.

 

5살 되던 해에 글공부를 시작했다. 부친이 글자를 가르쳤는데 배우면 금방 이해하고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이에 부친(김삼근)이 말하기를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고 했다고 전한다.

 

1447년(세종29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 충주에서 사학(四學) 교수(敎授)를 지냈고, 1480년(성종11년) 식년문과에 丙科로 급제하였다. 문과급제는 늦었지만(50세) 나이를 감안하여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았다. 그후 고령현감 · 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삼사(三司)의 요직인 사간원대사간(大司諫) 성균관대사성(大司成)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 응교(應敎), 전한(典翰)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대사간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掌令)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의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있다가 68세 되던 해(1498)에 풍산 사제(笥提)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왔다.

 

김계행은 또 30대 젊은 시절부터 길안(吉安)의 묵계촌(黙溪村)의 풍광에 심취하여 별장을 지었는데, 특히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는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던 장소였다.

 

사림파의 영수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평생에 걸쳐 교유하였다. 이 인연으로 무오사화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형(杖刑)을 치르고 풀려났다. 이 일은 뒤에도 수시로 그를 괴롭히는 빌미가 되었는데, 심지어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금부에 끌려가 형벌을 치르는 곤혹을 겪기도 하였다.

 

76세 되던 해(1506)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중종 12년(1517) 정축 12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천수87세 였다. 숙종 32(1706) 병술년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예안 (安東禮安)에 묵계서원(黙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철종10년(1859)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인데 고종 5년(1868) 무진 3월 12일 시호가 문헌(文獻)으로 추증되었다.

 

 

 

 

 

 

 

 

 

 

 

 

 

 

<참고>

의령(宜寧) 옥(玉)씨는 조선조에서 다섯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사미(斯美)의 아들 고(沽)이다. 자는 대가, 호는 응계(凝溪)로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원시를 거쳐 조선 정종(定宗) 1년(139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전적(典籍)을 거쳐 안동부 통판(安東府通判)을 지냈다.

이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예조정랑.봉상시소윤(奉常寺少尹).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냈고. 대구에 은거하였다. 학문이 광박(廣博)하고 청렴결백하여 당시 사림(士林)에서 명망이 높았으며 안동(安東) 묵계서원(默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응계선생실기(凝溪先生實記)'에서 응계(凝溪) 옥고(玉沽)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접할 수 있다.

 

 

 

 

 

 

* 본 자료는 조인스 카페가 모두 없어질 때 자료도 함께 소멸된 것을 복원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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