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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의 가을] 경주 분황사에도 가을이 곱게 내려앉다 / 2012.11.01.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등

토함 2013. 11. 3. 11:21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2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분황사 (芬黃寺)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4-1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 되었으며 신라 경도(京都)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景德王) 14년(775)에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 (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 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模塼石塔),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普光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 시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내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문화유적총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4-5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문화재청>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3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분황사 자료 더 보러가기> http://blog.daum.net/bori-yo/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