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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견대(利見臺) / 2009.12.29. 경주 감포읍 대본리

토함 2009. 12. 30. 12:44

 

 

사적  제159호  이견대(利見臺)

 

소재지  경북 경주시  감포읍 대본리 661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받들어 31대 왕인 신문왕이 681년에 세웠다.

신문왕은 해변가에 감은사라는 절을 짓고, 용이 된 아버지가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법당 밑에 동해를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다. 그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견대에서 신문왕이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옥대와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하나 받았다고도 한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신문왕이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크게 이익이 있었다는 뜻을 포함한 말인데,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란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발굴조사 때 건물이 있던 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신라의 건축양식을 추정하여 오늘날 새롭게 다시 지었다. <해설: 문화재청>

 

 

 

 이견정(利見亭) 앞쪽으로 대왕암(大王巖, 문무대왕릉)이 보인다.

 

 

 

 

 

 

 

 

 

 삼국통일을 최종적으로 완성한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인 대왕암(大王岩)을 바라 보는 절벽 위에 누정(樓亭)형식의 건물을 1979년에 건립하고, 이견정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신문왕은 부왕인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문무왕이 왜구를 진압하기 위하여 감은사를 창건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돌아 가자 신문왕이 이어 완성 하였는데, 금당(金堂) 아래에 용이 들어 올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으며, 그리고 용이 나타난 곳을 본 곳이 이견대라고 하였다는 기사가 전한다. 또 같은 『삼국유사』에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용으로부터 흑옥대(黑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받았다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악지(樂誌)에 의하면, 어느 왕 시기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 위에 건물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견대지(利見臺址)에 관하여는 현재 누정건물이 있는 장소라는 설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1968년 그 곳을 시굴한 바 몇 기의 초석자리 비슷한 적심부가 나타났으나, 신라시대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이견대지로 확정짓지 못하였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 조선시대문헌에는 이견대지가 이견원(利見院) 옆에 있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현 누정이 있는 자리는 조선시대의 이견원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또 한편으로 현재 누정이 있는 위치의 뒤 언덕 위에서 신라시대 와편이 출토되는 것을 근거로 이곳이 원래의 이견대지라는 견해도 있다.

"이견(利見)"이라는 말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나오는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 "이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이다.

<해설: 문화재청>

 

 

 

 

 

 

 

 

 이견대에서 바라 본 대왕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