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12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소재지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동서< 東西 >로 마주 서 있는 이 탑은 신라< 新羅 > 신문왕< 神文王 > 2년(682)에 세워진 석탑이다. 화강암< 花崗岩 > 이중기단< 二重基壇 > 위에 세워진 방형< 方形 > 중층< 重層 >의 이 탑은 동서 양탑< 兩塔 >이 같은 규모와 구조를 보인다. 하층기단< 下層基壇 >은 지대석< 地臺石 >과 면석< 面石 >을 같은 돌로 각각 12매의 석재< 石材 >로 구성하였다. 상층기단< 上層基壇 >은 면석을 12매로, 갑석< 甲石 >은 8매로 구성하였다. 탱주< 撑柱 >는 하층기단에 3주< 柱 >, 상층기단에 2주를 세웠다. 초층옥신< 初層屋身 >은 각 우주< 隅柱 >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은 각면이 한 돌, 3층은 전체가 한돌로 되었다. 옥개석< 屋蓋石 >은 받침돌로 별석< 別石 >으로 각층 4매씩의 돌로 되었다. 그리고 옥개석 받침은 각층마다 5단의 층급< 層級 >으로 되었다. 상륜부< 相輪部 >는 양탑 모두 노반< 露盤 >과 높이 3.3m의 철제< 鐵製 > 찰주< 擦柱 >가 남아 있다. 목조가구< 木造架構 >를 모방한 형적< 形蹟 >을 보이며 옥개석 받침을 층단식< 層段式 >으로 한 수법은 전탑< 塼塔 >의 전단계< 前段階 > 모습을 추정케 한다. 기단을 이중으로 하는 형식은 새로운 형식으로 이와 같은 양식은 이후로 한국 석탑의 규범< 規範 >을 이루는 것이 되었다. 또한 1960년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 舍利裝置 >가 발견되었다. 탑의 전체높이는 13.4m이다.
<해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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