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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문화재답사(오후)] 황복사지삼층석탑▶진평왕릉▶설총묘▶연화문당간지주▶보문리석조▶보문리사지▶보문리당간지주 / 2012.02.20. 경주

토함 2012. 4. 4. 23:03

[평지로 가는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

 

▲ 국보  제37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http://blog.daum.net/bori-yo/2016

 

 

 

 

 

 

국보 제37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103

 

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 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문화재청 사진자료>


국보  제79호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소재지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1934년 경주구황리 삼층석탑(국보 제37호)을 해체·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경주구황리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사리함에 새겨진 글에 의하면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나 크기가 6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불상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광배(光背)와 불신(佛身), 연꽃무늬 대좌(臺座)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각 부분은 분리되도록 만들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으며, 둥근 얼굴은 원만하다. 눈·코·입은 뚜렷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이상적인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 어깨는 넓고 당당하며, 양어깨를 덮은 대의는 가슴을 크게 열었고, 그 안에 대각선으로 내의를 걸쳐 입었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고, 무릎 위의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여 손등을 보이고 있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인동초·당초무늬·덩쿨무늬와 그 가장자리에 불꽃 무늬가 뚫을새김되어 있고, 몸광배에는 인동초·당초무늬와 덩쿨무늬를 이중으로 뚫을새김하였다. 대좌는 원형이며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와 균형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있게 보이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나 옷주름, 양감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세기 초 불상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황복사지 주변의 논밭에는 문화재들이 그냥 나딩굴고 있다.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2]   경주 진평왕릉(新羅眞平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사적 제180호  경주 진평왕릉(慶州 眞平王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

 

신라 26대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독자적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중앙 행정부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의 수·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효율적으로 막았고, 경주 명활산성을 보수하여 수도 방위에 힘썼다.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진평왕릉 → 경주 진평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3]   설총묘

 

▲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侯薛聰墓)  http://blog.daum.net/bori-yo/1221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전홍유후설총묘(傳弘儒侯薛聰墓)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423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인 설총의 묘이다.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널리 능통하였다고 한다. 신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후에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혔다.

그가 이두를 창제했다고도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서동요』, 선덕여왕 때의『풍요』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은 6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였으며,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도 공헌하였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문동 한복판 인가에 둘러 싸여 있는 묘에는 비문과 비석은 없으나, 예로부터 진평왕릉의 동쪽 보문리에 있다고 전해져 왔다. 최근에 그 앞에 상석이 하나 놓여졌으며 보존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문화재청>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4]   경주 보문동 연화문당간지주(慶州普門洞蓮華文幢竿支柱)

 

 

 

 

▲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동 연화문당간지주(慶州普門洞蓮華文幢竿支柱)  http://blog.daum.net/bori-yo/2158

 

 

 

       

 

 

 

 

 

보물 제910호  경주보문동연화문당간지주(慶州普門洞蓮華文幢竿支柱)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752-2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幢)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의 동남쪽에는 보문사의 옛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간지주가 속한 절이 원래 보문사였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이 당간지주는 넓은 논 한가운데에 62㎝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아래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밑의 구조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양쪽 지주의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꼭대기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너비 13㎝의 큼지막한 구멍을 두었다. 특히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는데,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잎을 장식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이 시기에 제작된 것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문화재청>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5]   경주보문리석조(慶州普門里石槽)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6]   경주보문리사지(慶州普門里寺址)

 

 

 

 

 

사적 제390호  경주보문리사지(慶州普門里寺址)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848-6외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를 가리킨다.

이 유적은 보문부락의 앞들판에 있으며 멀리 서쪽에는 경주 낭산(사적 제163호), 북쪽에는 명활산성(사적 제47호)이 있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발견되는 석재들로 미루어 당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시대 때 ‘보문사(普門寺)’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123호)와 석조(보물 제64호)를 비롯해 당시 탑 따위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문화재청>

 

 

 

 

 

 

 

 

 

 

 

 

 

 

 

 

 

 

 

 

 

 

 

 

 

 

 

[경주문화재답사(오후) 07]   경주보문리당간지주 

 

 

 

 

 

보물 제123호  경주보문리당간지주(慶州普門里幢竿支柱)

 

소재지  경북 경주시 보문동 856-3

 

절에서는 의식이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보문사터로 알려졌으며, 터에서 상당히 떨어진 서쪽에 이 당간지주가 서있다.

지주의 양 기둥이 62㎝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 기둥 가운데 북쪽 기둥은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남쪽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마련한 구멍은 위·중간·아래 3곳에 있는데,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 있어 특이하다.

이 당간지주는 전체적인 형태가 가늘고 긴 모습이나 안정감이 있다.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로, 매우 소박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문화재청>

 

 

 

 

 

 

 

 

 

 

 

 

 

 

 

이상으로 [평지로 가는 경주문화재답사] 오전, 오후 답사자료를 보셨습니다. 끝까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평지로 가는 경주문화재답사(오전)]  자료 바로가기  http://blog.daum.net/bori-yo/2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