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9호 경주계림(慶州鷄林)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교동 1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를 건국할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이라 하였다.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스러운 곳으로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
계림(鷄林)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 또는 신월성(新月城) - 사이에 있는 숲으로서 왕버들,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의 고목(古木)이 울창하게 서 있으며, 신라왕성(新羅王姓)인 김씨(金氏)의 시조(始祖) 김알지(金閼智)의 탄강전설(誕降傳說)과 관계 깊은 숲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김알지(金閼智) 탄강신화(誕降神話)는 다음과 같다.
탈해왕(脫解王) 4년(A.D. 60)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月城) 서쪽마을을 지나 가는데 마을 옆의 시림(始林)이 온통 환한 광명(光明)으로 차 있었다.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그 숲속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구름 속으로는 황금으로 된 궤(櫃)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숲속을 밝히는 그 광명(光明)은 황금궤(皇金櫃)에서 번져 나오고 있었고 그 나무에는 흰닭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호공(瓠公)은 궁궐로 달려가서 이 광경을 탈해왕(脫解王)에게 고(告)하자 왕(王)은 즉시 시림(始林)으로 거동하여 궤(櫃)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한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 같았다. 이 아이를 「알지(閼智)」라 이름하니 알지(閼智)란 곧 우리말로 「아기」를 뜻하는 것이다. 탈해왕(脫解王)이 「閼智」를 안고 궁으로 귀환하는데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왕은 「알지」를 태자(太子)로 삼았으나 후일 왕위(王位)를 파사(婆娑)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알지」는 금궤(金櫃)에서 나왔다고 해서 성(姓)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후 「알지(閼智)」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熱漢)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阿都)는 수유(首留)를 낳고 수유(首留)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郁部)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俱道)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는 김씨로서는 최초로 왕위(王位)에 올라 신라 13대왕이 되었다.
하늘에서 자주빛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거나 알(란(卵)) 대신에 금궤(金櫃)가 등장한 것 등을 보면 계림(鷄林)의 김알지신화 (金閼智神話)는 천손강림설화(天孫降臨說話)이자 난생설화(卵生說話)의 일종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김알지탄생일(金閼智誕生日)은 탈해왕(脫解王) 9년(A.D. 65)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삼국유사(三國遺事)』와는 약간 다르지만 시림(始林)에서 태어난 알지(閼智)의 기록은 역시 같다. 계림(鷄林)이란 명칭은 숲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하며 후에 국명(國名)으로도 되었다.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名)의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계림(鷄林)」이라는 문자(文字)나 박제상(朴堤上)이 왜왕(倭王)에게 계림(鷄林)」운운(云云)하는 점, 당서(唐書)의 백거이전(白居易傳)에 보이는 계림(鷄林)과 송조(宋朝) 손목(孫穆)의 계림유사(鷄林類事), 오식(吳植)의 계림지(鷄林誌) 왕란(王亂)의 계림지(鷄林誌) 등 여러 가지 예를 감안해 볼 때 계림(鷄林) 은 신라의 국명(國名)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시림(始林)은 신라(新羅)의 신성림(神聖林)이었고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도 모두 위와 같은 사실(史實)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약 100여주의 고목(古木)이 우거져 있으며 조선(朝鮮) 순조(純祖) 3년(A.D. 1803)에 세운 비가 서 있다.
사적 제188호 신라 내물왕릉(新羅奈勿王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교동 14
신라 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이다.
내물왕은 김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前秦)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높이 5.3m, 지름 2.2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석을 돌렸다. 무덤 주변을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있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무덤의 내부형태는 거대한 규모의 돌무지덧널무덤이나, 이 무덤은 규모가 작고 둘레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식돌방무덤으로 추정된다.
내물왕릉을 황남대총(98호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護石)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 석실분(新羅 橫穴式 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이지만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長方形)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재위(在位) 356-402)은 성이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말구각간(末仇角干)이며, 왕비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신라(新羅)에서 김씨(金氏)로서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金)에 이은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의 신라왕(新羅王)들이 모두 내물(奈勿)의 후손으로 신라 김씨왕조(新羅 金氏王朝)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신라는 이 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낙동강(洛東江) 동쪽을 아우르는 왕국(王國)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의 장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능(陵)이 첨성대 서남(瞻星臺 西南)에 있다고 하여 현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물왕(奈勿王)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왕조(金氏王朝)의 창시자로서 그 능(陵)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陵)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石室墳)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내물왕릉(奈勿王陵)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 대능원(大陵園)의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도 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내물왕계(奈勿王系)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新羅 下代) 왕실(王室)의 수축(修築)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해설: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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