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으로/폰카사진도 좋아요

[이천동 미륵불(제비원 석불, 보물 제115호)] 보물 제1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제비원 미륵의 정식 명칭은 이천동 석불상이라고 한다 / 토함

토함 2018. 6. 17. 06:55


▲제비원 석불(이천동 석불상, 2018.06.15. 안동)



'월간문화재사랑'의 '특별기획 문화유산 다시보기(안동편)'의 일부를 소개한다.  <자료 게시물 바로가기>


<안동지역의 전통가옥 까치구멍집(시도민속자료 69호)>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를 따라 5km쯤 가면 오른쪽 가파른 언덕 위에 조그마한 암자 연미사燕尾寺가 있다. 이 연미사에는 제비원 석불이라 불리는 석불이 있는데, 제비원이란 명칭에서 원院이란 바로 국가에서 인정한 여관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 초기를 지나면서 사찰의 숙식시설을 국가에서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했다고 하니, 제비원의 명칭이 가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제비원 석불은 거대한 바위 한 토막을 잘라 내고 그 사이 암벽에 마애불을 새긴 것으로 높이가 12.4m나 되는데, 몸체만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기고 머리는 다른 돌로 조각하여 얹어 놓은 것이다. 몸체를 이루는 자연암석도 위압적이지만 입을 꽉 다물고 눈에 힘을 잔뜩 준 모습이 매우 힘차고 위엄 있게 보인다. 이런 인상적인 석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쯤 없을 리 없다. 이 제비원 석불 역시 사연을 품고 있다. 옛날 제비원에 연燕이란 처녀가 있었단다. 연이는 인물 곱고 마음씨 착하며 불심도 깊었다. 한편 이웃 마을에는 김씨 부자父子가 살았는데 그들은 부유하였지만 인색하여 남을 도울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이 갑자기 죽어 저승에 가게 되었다. 염라대왕은 “네 죄가 많아 다음 생에는 소로 태어날 것이로되, 건너 마을 연이가 쌓아놓은 선행善行의 창고가 가득하니 좀 빌려 쓰면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저승에서 연이의 선행 재물 덕에 살아나 이승으로 돌아온 그 아들은 연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갑자기 큰 재물을 얻은 연이는 이를 모두 부처를 위하여 쓰기로 하고 법당을 지었다. 5년이나 지나 법당의 완공을 앞둔 바로 전 날, 와공瓦工이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바람에 그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고 그의 혼은 제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절을 제비사 또는 연미사라고 부르고 이 일대를 제비원 또는 연미원이라고 한다. 연이는 서른여덟 살 되던 해 동짓달 스무이튿날 죽었는데 그날 저녁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큰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지금의 석불이 나타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공덕을 쌓은 연이가 부처로 태어났다고 믿어 이 부처를 미륵불로 알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제비원 석불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제비원 미륵불의 머리 부분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 전 조선시대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라 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미륵불의 머리 부분을 칼로 쳐서 떨어뜨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이여송은 전란이 평정되자 조선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만한 지혈地穴을 찾아 지맥地脈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이 사방을 둘러보니 제비원에 큰 미륵불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분명 미륵불의 조화 때문에 말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생각한 이여송은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미륵의 목을 쳐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러자 말발굽이 떨어져 길을 갈 수 있었다. 지금도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당시 칼로 베일 때 가슴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있고, 왼쪽 어깨에는 말발굽의 자국이 있다. 이여송에 의해 떨어진 목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로 붙인 부분을 바르면서 염주 모양으로 불룩불룩하게 다듬어 놓았다. 그래서 머리와 목을 이은 자리를 보면 마치 염주를 목에 걸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제비원은 또한 성주의 본향으로 여겨진다. ‘성주나 본本이 어드메냐 / 경상도 안동땅의 제비나원이 본일넨데 / 제비원이다…’ - 해주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본향 본을 풀면 게 어디가 본이신고 / 안동주 천제비원에 할나산이 보이신가 / 할나산에 들으스니 대부동이 서 있난데…’ - 서울 지역 ‘황제풀이’ 부분 ‘성주로다 성주로다 성주 근본이 어디멘고 / 경상도 안동땅에 제비원에 파른 솔씨는/ 물안에 던졌더니 그 솔이 점점 자라나야…’ - 목포 지역 ‘성주굿‘ 부분 ‘성주 근본이 게 워딘가 /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의 솔씨받아’ - 광양 지역 씨끔굿 ‘성주’ 부분 전국의 성주풀이에 제비원이 본향으로 등장한다. 성주라는 것은 민간신앙에서 집집마다 그 집의 부귀영화와 평안을 지켜주는 신을 말하는데, 그러한 신의 근본지로 여겨졌다는 것은 민간신앙의 기원지라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종교문화의 근간을 이룬 무교는 삼국시대 이후 불교와 끊임없는 접촉을 통하여 융합되어 왔다. 무당을 보살이라 칭하고 사찰에 산신각, 칠성각 등이 있는 것은 이것을 말해 주는 증표다. 또한 불교적 측면에서도 미륵불로 형상화되어 있는 제비원의 의미는 가치가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 부처가 대두하게 되고, 현세 이후 다가올 세상을 구원하는 존재로서 미륵신앙이 민중들 사이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게 되면서, 사람들이 불교적 메시아로서 미륵을 찾게 되는 것이다. 미륵이 오게 될 미래의 세상은 물질이 지극히 풍족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답고, 누구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 없이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약속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불법에 귀의한 신자들이 누구를 막론하고 미륵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염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미륵불은 민간의 신앙대상으로 존재해 왔고 관련한 전설들도 민중의 이야기로 전해진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식 문화재 명칭인 이천동 석불상보다는 제비원 미륵불이라는 명칭이 더 알려져 있다. 이는 아마도 사랑과 삶의 내용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는 제비원이라는 명칭에 더욱 애정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제비원 석불(이천동 석불상, 2018.06.15.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