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림사지 쌍귀부(昌林寺址雙龜趺)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145
창림사지에 있는 쌍귀부는 모가 죽은 사각 대석 위에 두 마리의 거북이가 큰 비석을 등에 지고서 고개를 치켜 들고 유쾌하게 기어가 는 모습을 새긴 것이다. 거북이의 크기는 한 마리의 너비가 86.3cm, 길이 142.5cm, 높이 38.5cm이다. 지금 두 거북이의 머리가 모두 떨어 지고 없는데, 그 중 한 마리의 머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고 다른 한 마리의 머리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태종무열 왕릉(太宗武烈王陵)의 거북이(龜趺)가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먼 앞을 내다보는 힘찬 기상인데 비해 이 창림사지의 거북이들은 얼굴을 높이 들어 목을 뒤로 젖히고 입을 크게 벌리고 둥근 구슬을 물고 있다. 이는 거북이가 용으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이런 과정을 지나 통일신라말이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거북이들은 용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 귀부 위에 세운 비신(碑身)에는 신라의 서예가 김생(金生)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멀리 당(唐)나라에까지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비의 소재는 알 수 없다. <경주남산고적순례>
창림사지 쌍귀부(昌林寺址雙龜趺) 가까이 일반 분묘가 있고, 분묘 주변에는 주춧돌들이 많이 보인다.
솔숲을 따라 창림사지 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쪽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완전히 드러나 있는 주춧돌과 땅속에 묻혀 있는 초석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창림사지 (昌林寺址)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6-2
원나라 조자앙(趙子昻)의 창림사비발(昌林寺碑跋)에 신라 승(僧) 김 생(金生)의 글씨라 하였는데 '김생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10년(711)에 태어나 80세가 넘도록 붓을 쉬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어 창림사는 대략 원성왕(元聖王) 7년(79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변화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머리가 결실된 쌍두(雙頭) 귀부(龜趺), 석탑재, 석등연대(石燈蓮臺), 석불편 등이 남아 신라 예술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다. 상중하 3단으로 된 터전에 흩어진 초석들로 미루어 창림사가 대단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명문와당(銘文瓦當)과 이후에 발견된 귀부머리 하나가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문화유적총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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