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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신라 황금보검, 주인은 카자흐 사람일까

토함 2010. 2. 2. 00:15

황금보검 철검(왼쪽)과 검집 장식. 신라의 전형적인 대도(大刀)는 칼의 한쪽 면에만 날이 있지만 황금보검은 양쪽에 날이 있다. 칼이 칼집에 꽂힌 채 발굴된 것을 분리했다. 유리와 석류석으로 장식된 검. 유리는 풍화돼 색이 다소 바랬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1500년 전 신라 지증왕 집권 시기, 두 사람이 한 무덤에 나란히 묻혔다. 둘 다 남성용 금귀고리(細環耳飾)를 걸고 있었다. 키는 150~160㎝내외. 한 사람은 전형적인 신라의 대도(大刀)를 지니고 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황금보검을 차고 있었다. 경주에서 계림로라는 길을 내는 공사 도중 발굴돼 ‘계림로 14호묘’라 명명된 이 무덤의 황금보검(보물 635호)은 한 눈에도 신라 것이 아니었다. 당시 무덤에선 화살통과 말갖춤 등 270여 점이 함께 출토됐다.

이들이 출토 37년 만에 보존처리를 마치고 일반에 공개된다.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2일부터 4월 4일까지 황금보검 관련 유물 106점을 내보이는 ‘황금보검을 해부하다’를 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연다.

황금보검은 철검과 황금으로 된 장식을 분리해 전시했다. 날의 길이는 18㎝. 나무로 만든 검집은 거의 썩어 없어졌지만, 검집 앞면을 덮은 순금 황금판은 온전히 남아있다. 경주박물관 윤상덕 학예연구사는 “1500년 된 황금보검 가운데 이만큼 원형이 온전히 남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황금판은 석류석과 유리로 장식했다. 그 뒷면엔 금박을 깔아 반짝이는 효과를 높였다. 6세기경 유리는 금보다 귀한 보석으로 쳤다. 기존에 마노석이라 알려진 붉은 보석은 분석 결과 석류석으로 밝혀졌다.

윤 연구사는 “마노석은 신라에 일부 유입되었으나 석류석은 사용한 예가 없다”며 “석류석은 카자흐스탄 보로보에 무덤에서 나온 검 장식편에 사용된 바 있고, 흑해 북동부 아조프해 연안의 타간로크 지방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황금보검은 멀게는 카자흐스탄, 혹은 흑해 연안에서 제작됐으리라 추정된다. 6세기경 신라의 대외교류가 왕성했음을 보여준다.

철검 뒷면에선 ‘능(綾, 무늬가 있는 비단)’ 조각이 발견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골 이상의 귀족만 ‘능’을 입을 수 있었다. 함께 출토된 말갖춤에서도 매장자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 말안장가리개는 X선 분석 결과 금·은 입사로 장식한 사실이 확인됐다. 철판에 음각으로 용 문양을 파낸 뒤 금실과 은실을 두드려 넣은 것이다. 비단벌레 날개와 금으로 장식한 화살통도 처음 공개됐다. 금속 성분이 함유돼 공예의 귀한 재료로 쓰인 비단벌레 날개 장식은 금관이 출토되는 고분에서나 발견되곤 했다. 윤 연구사는 “두 남자 모두 진골 이상의 높은 신분으로 추정된다. 황금보검을 제외한 나머지 부장품과 부장풍습 모두 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이므로 신라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부부도 아닌 동성을 합장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나란히 출전했다 전사한 형제일까. 혹시 한 사람은 신라 귀족에게 장가 든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상상은 관객 몫이다.

경주=이경희<기자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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