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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옥씨 선영의 선대 묘소를 찾아가다 / 2012.11.18.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신전리 531

토함 2012. 12. 5. 11:40

 

 

 

의령(宜寧) 옥씨(玉氏) 시조(始祖) 의춘군 문혜공 휘 진서(宜春君/ 文惠公 諱 眞瑞) 할아버지께서 중국 당나라로부터 고구려 교수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서기635년으로 1377년 전의 일입니다. 오랜 세월 전쟁과 난리 통에 시조 이후 536년간의 기록이 전해 내려오지 못하여 윗대의 선조들이 어떻게 사시다가 어디에 영면하셨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록이 확인된 것은 1171년에 태어나신 창정공 휘 은종(倉正公 諱 恩宗) 할아버지 이후의 선조들로 지금 우리는 창정공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찍이 시조할아버지를 비롯한 선대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지 못하다가 1968년에야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옥 치연(致淵) 당시 대종 회장께서 독 부담으로 경모재내 현재의 위치에 시조 제단비를 세우고 시조향사를 모시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전국의 종친들이 이곳에 모이고 하나로 뭉치게 되었습니다. <의령 옥씨 대종회 홈페이지>

 

 

▲ 의령옥씨대종회에서는 의춘사 중수 준공식. 신위봉안례. 임진년 시향제 행사를 가졌다.(2012.11.18)

 

 

 시조  文惠公  諱 眞瑞  문혜공 휘 진서
 1세  倉正公  諱 恩宗  창정공 휘 은종
 2세  戶長正位公  諱 均之  호장정위공 휘 균지
 3세  戶長公  諱 文亮  호장공 휘 문량
 4세  戶長正朝公  諱 成  호장정조공 휘 성
 5세  成均生員公  諱 全伯  성균생원공 휘 전백
 5세  平章事公  諱 汝  평장사공 휘 여
 6세  進士公  諱 安德  진사공 휘 안덕

 

 

 

 

묘역 계단을 오르면서 의춘사를 내려다 봤습니다.

 

 

 

의령(宜寧) 옥씨(玉氏) 시조(始祖) 의춘군 문혜공 휘 진서(宜春君/ 文惠公 諱 眞瑞) 할아버지의 묘소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로는 확인할 수 없고, 기록이 확인된 것은 1171년에 태어나신 창정공 휘 은종(倉正公 諱 恩宗) 할아버지 이후의 선조들로 지금 우리는 창정공 할아버지를 중시조로 하여 세계(世系)를 정하고 있지만 창정공 할아버지 묘소 역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묘역에 올라보니 선대의 묘소가 아래쪽(사진에서는 앞쪽)에 있고, 그 뒤로 후손이 자리하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래쪽에 7세 정은공 휘 사온(正隱公 諱 斯溫)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뒤로 8세 별시위공 휘 호(別侍衛公 諱 浩) 할아버지, 9세 감사공 휘 화(監司公 諱 華)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가 보입니다.

 

 

 

 

 

 

 

 

 

 

 

 

 

 

 

 

 

 

 

 

 

 

 

 

 

 

 

 

 

 

 

 

 

 

 

 

 

 

 

의령 옥씨 대종회 홈페이지(http://www.의령옥씨대종회.kr/)에는

의령 옥(玉)씨의 기원(起源) 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옥씨의 시조 휘(諱/돌아가신분의 이름 앞에 붙임) 진서(眞瑞/옥씨 시조 할아버지의 이름)는 당나라 사람으로 당태종 9년, 서기 635년(고구려 영류왕18년)에 각 분야의 유생들을 가르칠 교수의 임무를 띠고 우리나라에 온 여덟 분의 재사(才士)중 한 분이시다.

 

 그 후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 조에서 벼슬하여 신라 문무왕 10년(서기 670년)까지 35년 동안 고구려와 신라에서 시(詩/시문 즉 문장) 서(書/글씨) 예(禮/예절 즉 사람의 도리) 악(樂/가사 와 악곡)의 학문과 군충(君忠/임금을 섬기고 나라에 충성함) 수기(修己/자신을 갈고 닦음) 치인(治人/사람을 이끌어 다스림)의 바른 길을 가르쳐 그 덕망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신라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의춘군(宜春君)에 봉작(封爵/작위를 내림)하여 의령땅(의춘은 의령의 옛 지명)에 살게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조정에서 문혜공(文惠公)의 시호(諡號/고관, 충신, 공신이 돌아가신 뒤 그의 생전의 행적을 임금님이 헤아려 내리는 칭호)를 내리시니 이 분이 의령 옥씨의 관향(貫鄕/본)을 얻은 시조(始祖)이시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지금의 의령을 본관(본)으로 삼고 대를 이어 오면서 영남을 중심으로 살다가 세월의 흐름과 종족의 세대가 번성함과 전란(戰亂), 정란(政亂) 등으로 전국으로 퍼져 살게 되었다. 

 

 이렇게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 땅에 오신지 1370여년이 되었으나 그 동안 난세를 거치면서 수차에 걸친 전쟁과 재난으로 대물려 내려오던 조상들의 문헌과 사적, 보첩(문중의 족보)등이 중간에 없어져 시조 이후의 자세한 내력을 기록으로 밝힐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오래 전 옛날에는 문자가 모든 백성에게 일반화 되지 않아 선조들이 누구나 기록을 남길 수 없었던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다가 1804년 고려시대 진성감무(珍城 監務/진성은 지금의 진주지역, 감무는 고려 말 현령을 둘 수 없는 현에 두었던 우두머리 벼슬)의 벼슬을 지낸 휘 사미(諱. 斯美. 7세손. 1355년생)의 김해 호적이 발견되었으며 그 호적의 기록에 사미의 위 6대조로 고려 신종 7년(1204년) 창정(倉正/고려시대관직으로 부호장과 같은 벼슬. 9등급으로 나누어지는 관직에서 셋째등급)의 벼슬을 지낸 은종(恩宗/1171년생, 고려 19대 명종 1년)까지 확인 되므로 은종을 기세조(起世祖/중시조,즉1세)로 하여 옥씨의 세보(世譜/세대와 계보)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은종은 중시조(中始祖)가 되는 것이며, 서기 635년 고구려에 오신 시조 의춘군 이후부터 중시조 은종이 출생한 서기 1171년까지 536년간의 공백을 밝힐만한 문헌과 보첩 등을 찾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에 대한 탐구와 연구는 계속 될 것이다.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우리 옥 씨의 본관은 의령(宜寧)뿐인 단본(본이 하나 뿐인 씨족)이라는 것이다.

 

뿌리를 깊이 알지 못하는 일부 종친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본관으로 밝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의령 옥씨 대종회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