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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학재(下學齋) / 2010.02.20. 포항 연일읍

토함 2010. 3. 26. 22:35

 

 

 

문화재자료 제356호(포항시) 하학재(下學齋)

 

소재지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달전리 177

 

조선 전기 문신인 손중돈(1463∼1529)의 묘 근처에 세운 재실이다.

그는 성종 21년(1489) 과거에 급제하였고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곳 주민들은 그의 선정을 기리고자 생사당(生祠堂)을 마련하여 선생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하였다. 중종 5년(1510) 청백리로 추대되었고 이조판서, 대사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중종 24년(1529)에 그가 67세의 나이로 죽자 임금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틀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현종 4년(1663)에 그의 고손자인 손종하가 세운 이 재실은 고종 10년(1873) 고쳐 지은 바 있으며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이다.

 

 

 

 

하학재(下學齋)는 조선 중종조(中宗朝)의 현신(賢臣)인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1463∼1529)의 도음산(禱陰山) 묘하제사(墓下齋舍)이다. 손중돈은 양동마을 입향조(入鄕祖)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1433∼1484)의 5남(男) 2녀(女)중 2남(男)으로, 1489년(성종 20년) 문과에 급기후 벼슬길에 올랐고, 연산군 10년 김해도호부사때 간인하다 파직되었으나, 중종(中宗) 즉위 후 1506년 상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매 주민들이 연임의 상소를 올렸고, 이임후 상주 단밀현(丹密縣)에 생사당을 세워 화상을 모시고 제향을 받들었다. 1509년 우승지에 승진, 이어 좌 ·도승지를 거치고 1510년 청백리에 록천되었으며, 형조 ·예조 ·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517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공조 ·이조판서와 세자시강원빈객을 지낸 후 도승지, 대사현, 대사간을 거쳐 경상 ·충청 ·전라 ·함경도의 관찰사 및 한성부윤 등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65세때인 1527년(중종 22년) 월성군(月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중종 24년 67세로 서울 사저에서 고종(考終)하니 국왕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조회를 2일 파하시니 출사 40년의 일이다. 왕이 제문을 지어 치제하고 당시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비롯하여 대소신료 50여명이 제문을 지어 그의 유업을 추모하였으며,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 유좌(酉坐)에 장시지냈다. 주종 28년 계사(癸巳)에 경절(景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도음산(禱蔭山) 묘하(墓下)의 재사(齋舍)인 하학재(下學齋) 우재(愚齋)의 현손(玄孫)인 종하(宗賀)가 1663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하나, 대청 상부가구에 있는 1873년에 기록된 상량문(上樑文)(숭정기원후오계유구월초육일신해말시립주이십일일병인사시상량(崇禎紀元後五癸酉九月初六日辛亥末時立柱二十一日丙寅巳時上樑))으로 보아 이때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진 것 같다.

건축(建築)배치(配置) 현황(現況)은 도음산(禱陰山) 묘하(墓下) 남방 300여m거리에 있는 하학제는 남남동향으로 높은 2중기단위에 좌정하였고, 그 앞 마당을 중심으로 서쪽 낮은 기단위에 제수청(祭需廳)이 동향으로, 동쪽에 주사(廚舍)가 서향으로 앉아 있다.

건물(建物)의 하학재(下學齋) 는 깬돌로 형성된 2중기단위에 앉은 하학제는 중앙 3간을 앞이 열린 우물마루를 깐 대칭으로 꾸미고, 양 퇴간에 동간 온돌방으로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들었다. 대청 뒷벽은 널벅이지만 각 간에 머름중방을 들이고 양개 널창문을 달았다. 청방간에는 앞간에는 3분합 궁판살문을, 뒷간에는 머름중방 위에 세살창문을 달았다. 온돌방 정면에는 머름중방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문을, 측면은 각 간에 외여닫이 세 살문을 내었다. 구조는 자연석 초석위에 전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웠고, 기둥 상부는 쇠서위에 연꽃을 조각한 초익공에 주두와 소로로 수장하였고 보머리에 봉두(鳳頭)를 꽂아 장식하였다. 대청상부 가구는 5량가(梁架)이고, 들보 위 동자주에 주두를 놓아 종보를 얹었으며, 종보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와 장혀를 받쳤다. 박공지붕의 양 측면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는데 아래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1800년대의 대중수시에 목구조 세부의 고격(古格)이 살아진 것으로 짐작된다.

제수청(祭需廳)은 깨돌을 두벌쌓은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집으로, 좌측 2간은 동간으로 제수청이다. 전면에는 각 간에 궁판양개세살문을 달았고, 바닥에는 비닐장판을 깔았으며, 3량가 연등천장의 종도리 하면에 ‘단기사이구십년사월이십일(檀紀四二九十年四月二十日) ’(1957년)이란 상량문이 기록되어 있다. 제수청으로도 외여닫이 문을 내었다. 오른쪽 끝은 간살이 좁은 제기고인데 마루바닥에 널벽으로 되어있고 전면에 양개 널문을 달았다.

주사(廚舍) ; 낮은 깬돌 기단위에 가는 각주를 세우고 평기와를 이은 집이다. 우측 끝에 간반 크기 부엌이 있고, 좌측으로 1간과 2간 온돌방이 연접되어 있다. 온돌방 앞에은 툇기둥을 세워 퇴간을 만들고 각 방으로 드나드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내었다. <해설: 문화재청>

 

 

 

 

 

 

 

 

 

 

 

 

 

 

 

 

 

 

 

 

 

 

 

 

 

 

 

 

 

 

 

 

 

단전저수지 상류 쪽에 하학재(下學齋)가 있고, 하학재 쪽에서 건너다 보이는 저수지 둑 근처에 주상절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