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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능을 괘릉(掛陵)이라 부른다 / 2010.12.12. 경주

토함 2010. 12. 25. 10:23

 

 

 

 

사적  제26호  경주괘릉(慶州掛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문화재청>

 

 

 

 

 

 

 

 

 

 

 

 

 

 

 

 

 

 

 

 

 

 

 

 

 

 

 

 

 

 

 

 

 

 

 

 

 

 

 

 

 

 

 

 

원성왕(통일신라 왕) [元聖王, 김경신, ?~798]

 

원성왕(元聖王, ? ~ 798년, 재위: 785년 ~ 798년)은 신라의 제38대 왕이다. 성은 김, 휘는 경신(敬信)이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은 선덕왕과 마찬가지로 내물왕의 12세손으로 되어 있다.

 

김경신은 혜공왕 때 선대 경덕왕의 관제개혁을 원상복귀 시키는 일에 참여 하였다. 선덕왕 1년(780년) 이찬(伊飡)으로 상대등(上大等) 김양상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선덕왕이 죽고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당과 통교하였다.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했고, 이어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여 농사를 장려했다.

 

김경신은 경덕왕과 성덕왕(김양상 외조부), 개성왕(추존, 김양상 아버지)의 사당을 허물고 자신의 부, 조부, 증조부의 사당을 세웠다. 또한 내물왕, 무열왕, 문무왕 및 조부인 흥평대왕(추존)과 부친인 명덕대왕(추존)을 국가 5묘로 지정하여, 자신의 조부와 아버지를 무열왕, 문무왕와 동등하게 만들었다.

 

원성왕은 자신의 고조부인 법선을 현성대왕, 증조부인 의관을 신영대왕, 할아버지 위문을 흥평대왕,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 어머니를 소문태후로 추봉하였다.

 

신라 하대는 원성왕 시대가 기점이다. 김경신은 무열왕계 경덕왕과 자신의 동료였던 김양상의 아버지 개성왕, 외조부 성덕왕의 사당을 허물었다. 불국사을 만들어 자신의 부, 조부을 모셨다. 원성왕이 불국사을 만든 목적은 새로운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김경신의 가계는 복호-습보-지증-진종-흠운-마차-법선-의관-위문-효양이다. 기록이 정확하다면 무열왕과 "지증"까지는 같은 혈통이다. <다음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