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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천도교)의 제2세 교조(敎祖), 최시형(崔時亨) / 2011.01.04. 경주

토함 2011. 1. 15. 20:14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 경북 경주~1898(광무 2).
동학(천도교)의 제2세 교조(敎祖).

 

심한 탄압 속에서도 포교활동과 교단정비를 통해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온건한 방법으로 동학을 합법화하고자 했으나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상(慶翔). 자는 경오(敬悟), 호는 해월(海月). 아버지는 종수(宗秀)이며, 어머니는 월성배씨(月城裴氏)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조지소(造紙所)의 고공(雇工)이 되었다. 19세 때 밀양손씨(密陽孫氏)와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흥해(興海)에서 살다가,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이 되었는데 일을 잘 처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33세 때 다시 검곡(劍谷)으로 이사했는데 이 시기의 잦은 이사는 생활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에 입교했다. 한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의범(儀範)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한울님의 말씀을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62년 3월 최제우로부터 포교에 힘쓰라는 명을 받고 영해·영덕·상주·흥해·예천·청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포교를 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었고, 8월 도통을 이어받았다. 그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관헌들의 눈을 피해 옥바라지를 하다가 최제우의 명교(命敎)를 받고 태백산·안동·평해 등지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1864년(고종 1) 3월 최제우가 처형되자 다음해 1월 평해에서 울진으로 거주를 옮겨 최제우의 부인과 아들을 보살폈다. 같은 해 6월 영양으로 이사한 후 수도에 힘써 1년에 4차례씩 49일간 기도했으며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를 외워 받아쓰게 하여 교도들에게 전했다. 1866년 10월 최제우의 탄신일에 모여든 교도들과 함께 계를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1년에 2차례의 모임을 통해 흩어진 교도들을 재결속시키고 신앙을 다져나갔다. 1871년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에서 이필제(李弼濟)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 난에 많은 동학교도들이 참가하여 이후 다시 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도피생활을 계속하면서 동학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1875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1878년 접소(接所)를 열고 교도들에게 접제(接制)의 통문(通文)을 돌려 최제우의 뜻에 따라 도를 펼 것을 알렸다. 1880년 5월 인제군 김현수(金顯洙)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세우고 〈동경대전〉을 간행했고, 1881년에는 단양 샘골 여규덕(呂圭德)의 집에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3년에는 목천군 김은경(金殷卿)의 집에 간행소를 세우고 〈동경대전〉 1,000여 부를 간행·보급했다. 1884년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육임제(六任制)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도 확장했다.

 

 

 

 

 

 

1892년 7월 호남의 접주 서인주(徐仁周)·서병학(徐丙鶴)이 찾아와 교조신원운동을 펼 것을 주장하자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이들이 독자적으로 충청도관찰사에게 소장을 내고, 많은 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을 주장하자 이에 동의하여, 11월 삼례역(參禮驛)에 신도들을 모집,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12월에는 정부에 상소문을 보냈으나 회신이 없자 1893년 2월 서울로 상경하여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정부의 대답을 듣고 해산했으나 이후 탄압이 더 심해지자 그해 3월 약 2만여 명의 신도들이 보은에 집결하여 교조신원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우면서 약 20일간 시위를 계속했다. 그해 7월 서병학 등이 정부를 공격하고 국가를 혁신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때가 아니라고 하여 반대했다. 1894년 1월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으나 처음에는 때가 아니라 하여 반대하다가 5월에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해산한 농민군이 10월 다시 봉기할 때 전체 동학교도에게 총기포(總起包)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말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최시형은 처음 설법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귀천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피력했으며, 그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한울을 키워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동학이 기본임을 알려주는 양천주설(養天主說), 신과 사람이 직접 합일된다는 향아설위(向我設位), 한울과 사람과 물(物)을 공경하라는 삼경설(三敬說), 세상 만물이 한울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니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는 것은 곧 한울이 한울을 먹는 것이라는 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 등 많은 법설을 남겼다. 또 우(愚)·묵(默)·눌(訥)을 강조하여 새 세상이 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니 인위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저항의 사상을 강조했다.
<해설: 다음 백과>

 

 

 

 

 

 

조선 말기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 1824년~1864년)는 아명은 복술(福述), 호는 수운(水雲)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최제우는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고(人心卽 天心),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吾心卽 汝心)이라 하였다.

 

또  제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사람을 하늘과 같이 대하라(事人如天)”이라 주장하였으며 동학의 제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은 동학의 근본 사상인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주창하였다.

 

(위의 사진은 경주 황성공원에서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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