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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내에는 어떤 유물이 있을까? / 2009.11.15. 경주 구황동

토함 2010. 2. 3. 20:00

 

 [분황사 석탑]

 

 

분황사 (芬黃寺)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4-1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 되었으며 신라 경도(京都)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景德王) 14년(775)에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 (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 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模塼石塔),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普光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 시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내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문화유적총람>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분황사화쟁국사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분황사(芬皇寺) 경내에 있으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원효의 화쟁국사비부이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으로 원효와 의상이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諡號)가 없어 그 덕이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그 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를 확인하고 "차신라화쟁국사지비부 김정희(此新羅和諍國師之碑趺 金正喜)"이라고 써 놓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의 소찬(所撰)인 화쟁국사비가 있으니 오금석(烏金石)이라' 하였다. 지금은 비부만 남아 있고 네 모서리는 떨어져 나갔다. <해설: 문화재청> 

 

 

 [대원심 보살 사리탑]

 

 [보광전]

 

 [분황사 석정]

 

유 적 명 :  분황사 석정 (芬皇寺石井)
주      소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4-5
지정사항 :  문화재자료 제9호
시      대 :  신라
종      류 :  기타 위인선현유적
참고사항 :  한국정신문화원,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0,

 

분황사 삼층석탑(芬皇寺三層石塔) 옆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이는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이라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이다. 우물의 외부는 8각이고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도정과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서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 데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용을 물고기 세 마리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이 일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 에도 이 절에는 석등과 대석 등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1974년 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그리고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을 수습하였다.

 

 

 

 

* 분황사 유물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별도로 하나씩 알아보기로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