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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리 귀부(龜趺)와 김인문 묘 / 2010.02.18. 경주

토함 2010. 2. 26. 15:56

 

 

위의 사진 왼쪽에 경주서악리귀부(慶州西岳里龜趺)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김인문묘(金仁問墓)가 있다.

 

 

 

 

 

보물 제70호  경주서악리귀부(慶州西岳里龜趺)

 

소재지  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서악리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귀부(龜跌)는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의 공적을 새겨 놓은 묘비(墓碑)의 대석(臺石)으로 알려지고 있다.

귀부의 크기는 길이 2.81m, 폭 2.14m이며 귀갑(龜甲)무늬를 새긴 거북등에는 비석을 꽂았던 흔적이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어져 있다. 이 귀부는 용두화(龍頭化)되기 이전의 귀두(龜頭)의 원형을 지니고 있어서 한국석비대석의 시원적(始原的) 형식(形式)이라 하겠다.

전체 구성(構成)이 조금 형식화되고 약해 보이는 느낌이 있으나 목을 길게 뽑아 들고 멀리 앞을 바라다보는 기상은 통일신라(統一新羅) 초기(初期)의 호국정신(護國精神)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해설: 문화재청>

 

 

 

 

 

 

 

 신라시대의 귀부들은 대부분 머리부분이 없어젔다. 머리가 잘보존된 귀부를 만나고 보니, 머리 부분을 마음껏 담고 싶다.

 

 

 

 

 

 

 

 

 위의 사진에서 귀부 뒤에 보이는 묘가 '김인문묘(金仁問墓)'이다.

 

 

시도기념물 제32호(경주시)  김인문묘(金仁問墓)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629∼694)의 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이 무덤은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룩하는데 공을 세운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친동생 김인문이다. 김인문은 20대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이 되었다. 인문은 외교(外交)에 능해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를 움직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일익(一翼)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인문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신라 효소왕(孝昭王) 3년(694)에 죽었는데 당(唐) 고종(高宗)은 그의 관(棺)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이곳에 장사지내게 했던 것이다. 그는 글씨에도 능해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의 비문(碑文)을 썼다. 무덤의 외형은 밑지름 26m, 높이 6.5m이나 특별한 시설은 없고 일반적인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해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