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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신문왕릉 / 2010.02.18. 경주 월성동

토함 2010. 3. 4. 19:52

 

 

 

사적 제181호  신라신문왕릉(新羅神文王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있어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전해져,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오단(五段) 정도 돌려쌓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護石)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 구조는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王陵)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王陵)의 동쪽에는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은 본명이 김정명(金政明)(혹은 김명지(金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長子)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 구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陵)은 낭산(浪山)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亡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陵)은 효소왕릉(孝昭王陵)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은 낭산(浪山)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쪽에 십이지석(十二支石)이 남아 있는 폐왕릉(廢王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해설: 문화재청>

 

 

 

 

 

 

 

 

 

 

 

사천왕사지 귀부에서 멀지않은 곳에 신문왕릉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