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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릉1(新羅興德王陵) / 2009.12.09. 경주 안강읍

토함 2010. 1. 7. 19:31

 

 

 

 

사적  제30호  신라흥덕왕릉(新羅興德王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무덤으로 무덤제도가 잘 갖추어진 왕릉이다.

흥덕왕의 본명은 김수종(경휘)이며, 제41대 헌덕왕의 아우이다.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고, 당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에 심어 재배하도록 하였다.

비교적 커다란 둥근 봉토분으로 무덤 밑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둘레돌은 먼저 바닥에 기단 역할을 하는 돌을 1단 깔고 그 위에 넓적한 면석을 세웠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각 탱석에는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다. 탱석과 면석 위에는 다시 갑석을 올려 마무리 하였다.

무덤의 주위 4모서리에는 각각 돌사자를 한마리씩 배치하였고, 앞쪽의 왼쪽과 오른쪽에 문인석·무인석을 각 1쌍씩 배치하였다. 무덤의 앞 왼쪽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비석을 받쳤던 거북이 모양의 귀부만 손상된 채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무덤의 위치가 이 무덤과 대체로 일치하며, 왕릉 주위에서 ‘흥덕’이라는 글자가 쓰여진 비석조각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있다. 전체적인 배치와 장식물의 양식으로 볼 때 성덕왕릉과 괘릉의 형식을 많이 본따고 있다.

 

 

 

 

 

망주석[화표주]

 

무덤 앞에 세우는 1쌍의 돌기둥.

 

망두석(望頭石)·망주석표(望柱石表)·화표주(華表柱)라고도 하며, 망주(望柱)는 준말이다. 주로 돌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다. 중국의 〈진서 陳書〉 예의(禮儀)에 "507년 양나라의 묘제(墓制)를 바로 잡았는데 석인(石人)·석수(石獸)·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을 세워 그 위에 이름·지위를 적는 것을 허락했다"라고 한 기록을 통해 망주석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전해진 망주석은 통일신라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 왕릉의 석물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능묘조각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예는 괘릉(掛陵)과 흥덕왕릉의 것이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일반화되었고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다음 백과>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陵墓制度)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新羅 王陵)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撑石)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護石)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은 괘릉(掛陵)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掛陵)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王陵)의 외부에는 사우(四隅)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石獅子) 배치와 같다. 능(陵)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王陵)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陵碑)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졌다. 귀부(龜趺)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聖德王陵)과 괘릉(掛陵)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在位)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경휘)(金秀宗(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全羅南道 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양(安康北 碑火壤)】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陵)이 흥덕왕릉(興德王陵)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해설: 문화재청>

 

 

 

 

 

 

 

 

귀부(비석받침)[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받침.

 

거북 모양의 잔등에 장방형의 받침(碑座)을 마련하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는 일은 중국 당(唐)나라 때부터 성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에 비석을 세울 때에는 일반적으로 땅에 묻거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통일신라 이후 당의 영향을 받아 귀부를 비좌로 삼게 되었고, 그뒤 조선시대까지 석비(石碑)의 전형적인 형식이 되었다. <다음 백과>

 

 

 

신라흥덕왕릉(新羅興德王陵)의  귀부(龜趺)는 다른 곳의  귀부보다 크고 세련되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