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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흥덕왕릉2(문인석, 무인석) / 2009.12.09. 경주 안강읍

토함 2010. 1. 7. 23:16

 

 

 

 

 

사적 제30호 신라 흥덕왕릉 (新羅興德王陵)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

 

흥덕왕은 신라 제42대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경휘(景徽)이다. 그는 이손(伊飡), 상대등을 거쳐 헌덕왕(憲德王) 14년(822)에 부군(副君)이 되었으며 826년 즉위하자 당에 사신을 파견, 당 문종(文宗)으 로부터 신라왕에 책봉되었다. 그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대사로 삼아 해적의 출몰을 막게 하였다. 봉분은 비교적 큰 것으로 봉분 밑에는 판석을 세워서 호석(護石)을 삼고 판석과 판석사이에 탱주(撑柱)를 세워 판석을 고정하도록 하였으며 위에는 갑석(甲石)을 얹었다. 탱주에는 각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조각하였고 호석 주변에는 방사형으로 박석을 깔고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나 난간기둥이 많이 없어졌다. 난간기둥에는 상하 두개의 원공(圓孔)을 뚫어서 관석(貫石)을 끼게 되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봉분 사우(四隅)에는 각각 석사자 한마리씩 배치하고 전방 좌우에 문인석 1쌍과 무인석 1쌍이 있다. 전방에 석화표(石華表) 1쌍이 있고 능전방좌측(陵前方左側)에는 능비를 세웠던 귀부(龜趺)가 있으나 손상이 심하고 탑신과 이수는 없어졌다. 표식물(表飾物)의 양식 및 배치로 보아 성덕왕릉(聖德王陵)과 원성왕릉(元聖王陵)을 모방하였다. <<삼국유사 >>에 의하면 장지(葬地)는 안강(安康) 북쪽 비화양(比火壤)에 왕비가 와 합장하였다고 하는데 현위치와 대체로 합치되고 왕비가 흥덕왕 1년에 돌아갔으므로 이때 왕릉이 축조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문화유적총람>

 

 

 

'무인석(武人石)'을 이해하려면 먼저, 해상권을 장악하고 활발하게 무역활동을 하였던 '장보고(張保皐)'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 백과사전>에서 '장보고'를 검색하였다.

 

 

 장보고 (신라 호족)  [張保皐, 궁복]

 

?~846(문성왕 8).  신라 하대의 호족·대상.

 

본명은 궁복(弓福)·궁파(弓巴).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며,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예에 자질이 있어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뒤 828년(흥덕왕 3) 왕에게 청해(淸海)를 진수(鎭守)할 것을 청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군사 1만 명을 모아 청해진(淸海鎭 : 지금의 완도)을 건설했다. 청해진은 7세기말에서 8세기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이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에게 내려진 대사(大使)라는 직명도 다른 군진의 진두(鎭頭)·두상(頭上) 등 신라의 정규 관직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당·신라·일본을 잇는 해상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신라 지배체제의 외곽적 존재로서 해상무역을 통해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한 그는 당나라에 견당매물사(遣唐賣物使)와 함께 교관선(交關船)이라는 무역선을 보내 교역활동을 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일본에 회역사(廻易使)를 파견하여 서신과 물건을 보냈다. 일본측은 이를 사교(私交)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무역은 허용했고, 그 사자와 이충(李忠)·양원(楊圓) 등에게 식량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의 세력은 국제적으로 극히 번성하여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둥 성[山東省] 원덩 현[文登縣] 츠산춘[赤山村]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속해 있었는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했다.

 

그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쟁탈전에도 개입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왕위계승분쟁에서 패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으로 와 그에게 의탁했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신무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읍(食邑) 2,000호를 봉해주었다. 신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즉위와 함께 그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장복(章腹)을 내렸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자객으로 보내 그를 살해하게 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뒤에도 얼마 간 유지되었으며, 851년에야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김제)으로 옮길 수 있었다. <다음 백과>

 

 

 

 무인석(武人石)의 큰 얼굴에는 광대뼈가 튀어나왔고 콧날은 우뚝 선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머리에는 아랍식 둥근 터번을 쓰고 있다. 그리고 250cm 정도의 큰 키로 만든 것을 보면 키가 큰 아랍인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그만 상단을 꾸릴려고 해도 무인(武人)이 필요한데 대규모 무역을 할 때는 해적을 물리칠 무인이 필수적이다. 무인석은 손에 무기를 든 모습을 하고 있다.

 

 

 

 

 

 

 

 

 

 

 

 

 

 

 

 

 

 

 

 

 

 

다소곳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