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와 여행/어딜 다녀왔니?

괘릉1(慶州掛陵, 元聖王陵) / 2009.12.11. 경주 외동읍

토함 2009. 12. 23. 21:48

 

 

사적  제26호  경주괘릉(慶州掛陵)

소재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괘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괘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해설: 문화재청>

 

  

 

 신라 제 38대 원성왕(元聖王)의 능(陵)을 괘릉(掛陵)이라 부른다.

  

 

 

원성왕(통일신라 왕) [元聖王, 김경신, ?~798]

 

신라의 제38대 왕(785~798 재위).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 효양(孝讓)이며,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朴氏:또는 知烏夫人朴氏)이다. 비(妃)는 김씨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780년(혜공왕 16)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죽인 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다툼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었고 그때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너오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큰 자리는 본래 인모(人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내세우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본래 덕망이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얼마 안 있어 비가 그치고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뒤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아찬 여삼(餘三)의 해몽을 따라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올렸더니 알천의 물이 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왕위에 오른 경신은 고조부 법선(法宣)을 현성대왕(玄聖大王), 증조부 의관(義寬)을 신영대왕(神英大王), 할아버지 위문(魏文)을 흥평대왕(興平大王), 아버지 효양을 명덕대왕(明德大王), 어머니를 소문태후(昭文太后)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선덕왕의 생부)의 2묘(二廟)를 없애고, 시조대왕(始祖大王:味鄒尼師今)·태종대왕(太宗大王:武烈王)·문무대왕(文武大王)·흥평대왕·명덕대왕을 5묘(五廟)로 했다. 785년(원성왕 1) 총관(摠管)을 도독(都督)으로 바꾸었고, 788년 독서3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해 관리를 등용했다. 790년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 발해와 통교했다. 원성왕 때 와서 신라 하대 권력구조의 특징인 왕실친족집단에 의한 권력장악의 틀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과 왕자를 중심으로 좁은 범위의 근친 왕족들이 상대등·병부령·재상 등의 요직을 장악했으며, 이들이 그뒤 왕위를 이어서 하대 원성왕계로 불린다.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785년 승관(僧官)을 두었으며, 795년에는 봉은사(奉恩寺:또는 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798년 12월 왕이 죽으니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시신을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했다.

<해설: 다음 백과사전>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