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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향교(慶州鄕校) / 2010.02.18. 경주 월성동(교리)

토함 2010. 3. 4. 22:08

 

 

 

시도유형문화재 제191호(경주시)  경주향교(慶州鄕校)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교동 17-1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 이어서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향교(鄕校)는 고려(高麗)·조선시대(朝鮮時代)에 지방(地方)의 국립(國立) 교육기관(敎育機關)이다. 성현(聖賢)을 배향(配享)하고 학생(學生)들에게 강학(講學)을 하는 두 공간(空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공자(孔子)를 비롯한 성현(聖賢)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동·서무에는 공자의 제자(弟子)나 현인(賢人)들을 모신다. 강당(講堂)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서재(東·西齋)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이다. 이 향교는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 (682)에 국학(國學)을 창설(創設)한 곳이며, 고려시대에는 향학(鄕學)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온 유서(由緖) 깊은 장소이다. 이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成宗) 23년 (1492)에 경주부윤(慶州府尹) 최응현(崔應賢)이 중수(重修)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燒失)된 것을 선조(宣祖) 33년 (1600)에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대성전과 전사청(典祀廳)을 중건(重建)하고, 선조 37년 (1604)에 부윤 윤성이 동·서무를, 광해군(光海君) 6년 (1614년)에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명륜당과 동·서재를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이 향교는 경상북도(慶尙北道) 내에서 가장 크며, 건물 배치는 나주향교(羅州鄕校)와 함께 향교의 표본(標本)이다. <해설: 문화재청>

 

 

 

 동문으로 들어가니 우물윗돌(石井上石)이 먼저 보인다.

 

 

 

 

 

 

 

 

 

 

 명륜당 뜨락에서 한 컷~~

 

 

 

 

 경주향교 정문이 잠겨 있어 동문으로 돌아 한참을 걸어서 대성전 정문을 찍었다. 대성전 정문도 잠겨 있기에 담 넘으로 '대성전'을 담았다.

 

 

 

 

 경주향교 배치도에 나타난 땅의 모양이 세로로 조금 길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가상학(家相學)적으로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